조선왕릉
이야기

조선왕계도

태조느낌표 물음표
느낌표 태조 이성계의 집안은 전주 이씨로 그의 6대조 이린은 고려 무신집권자 중 한 사람인 이의방의 동생이었다. 이의방이 권력다툼에서 패하여 죽을 때 이린의 아들 이양무와 손자 이안사는 삼척으로 피신하였고, 그 후 이안사대에 일족이 고려의 동북 국경을 넘어 지금의 함경도 지방으로 들어갔다. 이안사부터 이자춘까지 4대에 걸쳐 원나라의 지방 관리를 지내는 한편, 강력한 지역세력과 결혼하면서 이자춘,성계 부자 대에는 함흥지방을 중심으로 세력 기반을 굳혀갔다. 이성계는 선대가 이룩해 놓은 세력기반 위에서 자신의 뛰어난 무예와 전공으로 당시 고려조정에 혜성처럼 등장할 수 있었고, 동북지방의 강력한 군사들은 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쳐 민심을 모은 이성계는 1392년에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세웠다. 1393년 나라 이름은 '조선'으로 바꾸고 서울을 한양으로 정한 후 1396년 9월까지 종묘,사직,궁궐,성곽 등을 지어 도성을 완성시켜갔다. 1394년에는 조선 최초의 법전 '조선경국전'도 완성하였다. 새 나라가 세워지고 난 후 백성들의 생활은 훨씬 나아졌고 사회는 새로운 질서로 안정되어 갔다. 조선왕조는 고려왕조의 한계를 딛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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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호칭 살아있을 때 왕의 이름이 휘諱라면 죽은 후의 이름은 종묘에 올리는 묘호廟號라 할 수 있다.
묘호는 두 글자인데 앞의 글자는 생전에 왕의 업적을 평가하여 붙이는 것으로 왕에 따라 달라지고, 뒤의 글자는 '조'나 '종' 중 하나를 붙였다. '조'는 나라를 세우거나 중흥시키는 등 공적이 두드러지는 경우에, '종'은 앞선 왕의 업적을 물려받아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 문물을 융성하게 한 경우에 붙였다. 또한 왕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 딸은 ‘공주’라 불렀고, 후궁의 아들은 ‘군’, 딸은 ‘옹주’였다.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이 되었다. 한편 적통이 끊어져 방계가 왕이 될 경우 왕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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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느낌표
느낌표 정종은 태조의 전위로 왕위에 올랐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진압된 후 아우 방원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종친,외척,공신들이 개인의 군사를 갖지 못하게 하고 일반 정무와 군사업무를 분리시키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들이 방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같은 해 11월 정종은 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이 되어 격구,사냥,온천,연회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63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 후에 오랫동안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7년)에 비로소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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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느낌표
느낌표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던 태종은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던 외척과 공신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막아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태종은 의정부,의금부 등 관제개혁을 이루고 중앙과 지방제도를 새롭게 고치는 한편, 국방을 강화하고 세금을 거두는 제도를 바로 잡아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고 국가체제를 굳건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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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느낌표
느낌표 세종은 태종이 이룩해놓은 정치적 안정과 강화된 왕권을 이어받아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발전을 이루었고, 조선왕조 유교정치의 기틀을 세웠다. 집현전을 통해 길러진 많은 인재들에 의해 유교적인 의례와 제도가 정리되고, 수많은 편찬사업이 이루어져 유교정치 발전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또한 우리 민족의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농업과 의약 및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으며 법률을 정리하여 새로운 법전을 만들어내는 한편, 토지와 세금제도를 고쳐 조선시대 국가재정의 기본을 마련하였다. 또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는 등 세종은 조선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운 성군으로 기록되는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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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느낌표
느낌표 문종은 29세 되던 해인1442년부터 세종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다가 1450년 왕위에 올랐다. 문종의 통치시대는 세종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세종대에 마무리되지 못하였던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편찬되었다. 문종은 유학뿐만 아니라 천문과 역술에도 밝았고, 군사제도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던 문종은 재위 2년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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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느낌표 물음표
느낌표 세종대에 확립된 적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12세의 단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어린 임금의 왕권은 불안하였다. 결국 삼촌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양위받아 세조로 등극하게 된다. 단종은 상왕이 되었지만, 사육신 사건에 휘말려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된 채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1681년(숙종7) 단종은 다시 ‘노산대군’이 되었고, 1698년(숙종24)에 마침내 ‘단종’이라는 왕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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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사건 1456년(세조2) 집현전 학사출신의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과 무신 유응부 등 여섯 사람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자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영월에 유배되고 김문기, 성승 등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집현전이 없어졌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17)에 정식으로 나라에서 인정하고 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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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느낌표
느낌표 세조는 선대왕의 좋은 정치 사례를 모은 ‘국조보감’을 편찬하는 한편, 관직체계를 바꾸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제도를 새롭게 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등 조선전기 중앙집권 체제를 이루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전,현직의 모든 관원들에게 땅을 나누어주는 제도를 고쳐 현직관원들에게만 땅을 주는 직전법을 시행해 재정을 안정시켰다. 조선시대 법전의 기준이 된 ‘경국대전’ 편찬 역시 세조대에 시작하여 당대에 ‘호전’과 ‘형전’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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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느낌표
느낌표 예종대에는 세계지도인 ‘천하도’가 만들어졌고, 경국대전‘이 1차 완성되었다. 그러나 예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469년 예종이 일찍 죽자 그 아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세조의 첫째 아들 덕종(추존왕)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성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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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느낌표
느낌표 성종은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하였던 ‘경국대전’을 거듭 수정,보완하여 1485년에 완성,반포하였다.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완하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통치의 근거인 법률제도를 완성시켰다. 또한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을 많이 등용하여 세력의 균형을 이루어 왕권을 안정시키고, 이들을 학술연구기관인 홍문관에 배치하여 조선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종은 편찬사업을 일으켜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 ‘오례의’, ‘악학궤범’ 등을 펴내 조선전기 문화를 정리하였고,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의 여진족을 제압하여 국경을 안정시켰다.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가 그의 대에 완성되니, 이것이 그가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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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느낌표 물음표
느낌표 연산군은 19세에 왕위에 오른 후 12년 동안 두 번의 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또한 사냥을 위해 궁궐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고, 사치와 향락으로 탕진한 국고를 메우기 위해 세금을 거듭 징수하는 등 계속되는 폭정으로 민심마저 잃었다. 결국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1506년 9월 연산군으로 낮추어져 강화군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 역병이 도는 교동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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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사화 ‘무오사화’는 1498년, 즉 무오년에 선비들이 화를 당하였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사화는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김일손이 정리한 사초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이 들어있는 것이 발단이 되었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글인데, 이것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 하여 사림파 관리들이 처형당한 것이다. 이후 폐비 윤씨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연산군은 연루된 관리들과 성종의 후궁들까지도 죽이게 된다. 이때 처형된 관리들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모두 포함되었다. 이 사건은 1504년 갑자년에 일어났으므로 ‘갑자사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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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느낌표
느낌표 중종은 학문연구기관인 홍문관을 강화하고, 많은 동활자를 만들어 ‘신증동국여지승람’ ‘속동문선’ 등 역사,지리,언어,문학,사회 각 방면의 책들을 펴냈으며,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등 연산군대에 무너진 유교적 통치질서를 다시 세우려 애썼다. 중종이 신임하였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들이 기묘사화로 처형되기도 하였지만, 중종대 조선사회에는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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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느낌표
느낌표 인종은 1520년 세자에 책봉되어 25년간 세자로 있다가 1544년 30세에 즉위하였다. 즉위한 다음 해 기묘사화로 없어졌던 현량과를 다시 만들고 조광조를 신원해 주었으며, 이언적 등 사림의 뛰어난 인물들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세자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인종은 즉위 후 병이 더욱 깊어져 재위 8개월만에 경원대군(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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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느낌표
느낌표 명종은 12세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권력이 외척에게 기울어져 많은 폐단을 낳았다. 문정왕후가 죽은 후 명종은 권력자 윤원형을 유배시키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치를 새롭게 하려 하였으나 2년 후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명종의 후사가 없자 1565년 중종의 일곱째 아들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후계자로 정하니, 이가 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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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느낌표
느낌표 선조는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사람을 많이 등용하였으며, 이황과 이이 등 훌륭한 유학자를 극진히 예우하며 나라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려 노력하였다. 조정을 장악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새로운 정치형태인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하였지만, 중국으로 도망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여 마침내 나라를 지켜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계속되는 흉년 속에서도 선조는 피해 복구와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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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느낌표
느낌표 광해군은 적통 왕자가 없는 상황에서 임진왜란이라는 나라의 큰 위기를 맞아 서자로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모으는 등 전쟁 중에 세자로서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고, 왕이 된 후에도 명나라와 새로운 강국 후금이 싸우는 가운데 뛰어난 외교를 펼쳐 나라가 다시 일어서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광해군으로 강등되고 유배지 제주도에서 영욕의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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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느낌표
느낌표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후금을 멀리해 결국 청을 자극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그러나 인조대는 청을 통해 서양문화가 전파되고, 송시열,김육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후기 성리학의 융성기를 준비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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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느낌표
느낌표 청에 인질로 잡혀갔던 효종은 즉위 후 청을 공격하기 위해 북벌을 준비하였다. 북벌준비는 왕권과 국방력의 강화, 그리고 사회의 통합으로 연결되었지만, 재위 10년만에 효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북벌계획은 사실상 끝났다. 효종대는 태양력에 의거한 새 역법이 채택되었으며, ‘농가집성’이 만들어지는 등 농업생산성이 높아지고, 전쟁으로 흐트러진 윤리질서가 바로잡혀간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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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느낌표
느낌표 현종은 효종이 인질로 끌려갔던 중국 선양에서 출생하였다. 현종 재위기간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지만, 남인과 서인의 예학에 대한 해석 차이가 정권의 교체로 연결되는 논쟁이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예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성리학 발전에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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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느낌표
느낌표 숙종대는 붕당정치가 절정에 달한 동시에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온 사회체제 전반의 복구작업이 거의 마무리되고, 상인,역관 등 중인세력들의 정치참여가 확대되는 등 사회,경제적인 발전으로 왕조 중흥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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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느낌표
느낌표 경종이 숙종의 뒤를 이었지만 병약하고 아들이 없자 노론의 지지를 받은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이 왕세제가 되어 뒤를 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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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느낌표 물음표
느낌표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책을 써서 과열된 당쟁을 해소하고자 하였고,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는 등 정치,사회적 문제점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경제문제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저수지를 고치고 청계천을 준설하는 등 수리사업에 힘썼으며, 탈세방지에도 노력하였다. 1776년 83세로 승하하니 조선왕조의 왕들 중에서 재우기간이 가장 긴 52년이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는 ‘영종’이었으나 1890년(고종27)에 ‘영조’로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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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과 사도세자의 죽음 영조는 자신이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어준 노론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였다. 결국 남인과 소론을 견제하려는 노론세력을 감당하지 못한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장조 추존왕)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영조는 이 사건 후 사도세자의 어린 아들인 세손을 일찍 죽은 첫째 아들 효장세자(진종 추존왕)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토을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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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느낌표 물음표
느낌표 학문연마에 힘썼던 정조는 청나라 건륭문화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연구하는 한편, 학문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였다. 규장각은 학문연구 뿐만아니라 정권의 핵심적인 기구로 발전하여 정조대 문화정치와 강력한 왕권의 확립에 기반이 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를 화성으로 이장하여 자주 행차하였다. 화성은 정조대 문예부흥과 과학기술 발전의 상징물로 거중기 등 근대적인 기기를 사용하여 벽돌로 성벽을 쌓은 계획도시였다.
정조는 화성에 그의 친위군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설치하여 왕권강화를 뒷받침하는 군사력을 길렀다. 조선후기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정조는 재위 2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올린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1899년(광무3)에 ‘정조’로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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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정조 즉위년 3월에 궐내에 설치한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한 관서였다. ‘규장’이란 임금의 어필과 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규장각의 원래 기능은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유언 등을 보관,관리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혁신정치를 위한 중추기구로 삼아 국가정책을 기획연구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국내외 서적을 수집,간행하는 등 문예부흥을 주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후 규장각의 성격은 변화되어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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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느낌표
느낌표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과 어린 아들(순조)의 등극은 정조대 이루어졌던 문화정치와 강력한 군주의 위상을 후퇴시켰다. 11세에 왕위에 오른 순조는 15세에 친정을 시작하였지만, 장인인 안동 김씨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 아래에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순조대에는 공노비가 해방되고,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없어지는 등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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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느낌표
느낌표 순조가 말년에 대리청정을 맡겼던 효명세자(문조 추존왕)가 갑작스럽게 죽자 어린 세손(헌종)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어린 왕을 대신해 할머니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헌종이 직접 정사를 돌보게 된 이후에도 어머니 신정황후의 집안인 풍양조씨가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헌종은 재위기간이 짧았지만 특히 문예에 관한 남다른 열정으로 많은 서화와 인장 등을 수집하였다. 1849년 헌종은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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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느낌표 물음표
느낌표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영조에서부터 내려온 혈통은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로 일찍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농사만 짓고 살아온 이원범밖에 없었다. 그가 철종이다. 철종은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벗어난 이듬해인 1853년부터 재해를 입은 백성들을 구원하고, 세금 징수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세도정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33세의 나이에 옹주 한 명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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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와 수렴청정 대비는 전왕의 왕비이며 현왕의 어머니를 이르는 호칭이나, 현왕의 할머니와 증조할머니인 왕대비, 대왕대비를 통틀어 대비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대비는 왕실의 어른으로서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후계왕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에는 대비가 후계자 지명권을 가졌다. 또한 후계왕이 어릴 경우에는 수렴청정을 행하여 왕조의 실제적인 군주로 군림하였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되기까지 일정기간 대비가 국정을 대리하여 처리하던 것으로서 남녀유별로 발을 내린 채 정치를 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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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느낌표
느낌표 고종은 안으로는 통치질서가 무너져가고 밖으로는 서양세력의 압박이 심해지는 어려운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10년간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쇄국정책에 의지하고, 친정 이후에는 왕비인 명성황후 민씨의 척족들을 등용하는 한편, 1897년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 나라를 지키려 애썼지만,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고 말았다. 1919년 고종의 장례가 치러지는 날 전국적으로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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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느낌표
느낌표 고종의 퇴위로 왕위에 오른 순종은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미 일본의 간섭이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군대가 해산되고 사법권이 박탈되었으며 급기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다.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복동생인 이은(영친왕)을 황태자로 삼았다. 1926년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순종의 장례가 치러지는 날에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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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느낌표
느낌표 영친왕은 1907년 11살의 나이로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바로 그해 강제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태자비가 간택되었지만 가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영친왕은 일본왕족 나시모토의 장녀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순종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형식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광복 후까지 귀국하지 못하다가 1963년 국적을 회복하고 영친왕비와 함께 귀국하였다. 황세손 이구가 있었으나 후사 없이 2005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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